몸이 입는 가구, 가구가 눕는 몸: 줄리앙 스피와크의 « Corps de style » 시리즈
권진 (독립 큐레이터)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상상은 종종 하나의 장면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한편의 영화를 기억해내야 할 때, 어떤 장면을 떠올리면 앞 뒤의 이야기 조각들이 꿰어 맞춰진다. 잊혀진 추억 속 하나의 이름도 그와 연결된 어떤 장면부터 거꾸 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명해질 때가 있다. 줄리앙 스피와크의 사진은 정확하게 이러한 인식의 지점을 프레임 위로 불러들인다. 사진 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 그러니까 구도, 색감, 명암, 시선, 의미와 기호의 구성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매우 단단하게 정돈되어 있다. 요즘처럼 후 보정 작업이 필수적인 프로세스가 된 세상에서 사진이라는 매체가 꼼꼼한 연출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세공에 가까운 수준으로 완벽하게 제어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려는 바로 그 찰 나에서 멈춤 버튼을 누르고 변죽을 올린다.
사진가 줄리앙 스피와크는 2005년부터 파리 북쪽에 위치한 생 투앙 벼룩시장의 고가구 상점을 돌아다니며 앤틱 가구와 가구에 얽 힌 여러가지 관심사를 사진 작업으로 다뤄왔다. 이 관심사의 범주는 단순히 심미적 취향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오래된 가구를 가깝게 들여다 보고, 가구가 놓여져 있는 공간과 주변 오브제를 적극 끌어들여 의미를 확장시킨다. 다르게 말하자면, 가구 마다의 스타일과 장식 미술의 역사성, 가구를 만들었을 장인의 손길이나, 가구를 거쳐간 지난 주인 등 대상이 내포한 ‘속내’를 상상 하게 하는 장면들을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출된 공간 속에 슬며시 들어가 있는, 아니 적재 적소에 배치된 신체의 일부분 은 주변과 유기적으로 대응하며 판타지적 서사를 만든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체의 부분들은 구체적인 정보나 기호를 전달하는 가 구와는 달리, 퍼포먼스적 요소로 작동한다. 예를 들면, 커튼 걸이 처럼 삐져나온 팔뚝, 흉상의 목을 감싸는 손, 커튼 아래 살짝 보이 는 발, 옷장에 걸려진 옷들 사이의 몸통은 프레임 속 꽉 짜여진 구성 안에서 유일하게 리듬을 싣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동시에 이러한 몸-조각은 신체의 지각, 환경과의 관계, 시간성 등 대한 확장된 의미를 끌어들인다. 이렇게 작가는 모든 상황과 정황을 정확 하게 통제하며 그림과도 같은 장면들을 완성한다.
<Corps de style>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시점은 파리 낭만주의 미술관의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작업한 2012년 이다. 이 미술관에는 17-18세기 프랑스 왕의 자손들과 귀족들의 초상화, 쇼팽의 연인으로 유명한 화가 조르주 상드가 사용했던 앤틱 가 구들, 잔다르크 조각상 등 낭만주의 양식과 시대적 풍경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미술관 컬렉션과 풍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 작에서는 앤틱 가구가 놓여져 있는 인테리어에 충실했던 예전 작품에서 보여준 판타지의 강도를 한층 세게 누른다. 이번에는 아주 직접적으로 사진의 예술성과 예술의 낭만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유럽 미술사에서 낭만주의는 굳건하게 존재하는 미적 경향이고, 질 서고, 규범이며, 그래서 우리를 장악하는 선명한 기호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수 많은 영화, 패션, 문학에서 유럽의 낭만 주의는 재생산되고, 문화화되어 낭만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포섭해 왔다. 거기다가 미술관이라는 곳은, 이러한 시대적 유물의 사 회적 지위를 재확인하는 장소다. 그래서 미술관 풍경을 활용한 사진들은 이렇게 강력하지만 익숙하고, 동시에 우리와 같은 비유럽 관객들에겐 이국적인 문화적 기호를 꾹꾹 눌러 담고 있다. 그런데 불현듯 우리 눈에 어떤 구멍이 들어오면, 다시 말해 이 완벽한 이 미지 속에 숨어 있는 신체의 일부분이 발각되는 순간, 익숙한 판타지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능적이고, 새롭고, 낯설고, 그래 서 다음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마구 불러 일으키는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환원된다.
권진 (독립 큐레이터)